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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란?

도시라는 단어에는 정치 또는 행정의 중심지라는 뜻과 경제의 중심지라는 뜻이 내포가 되어있다. 따라서 도시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이 곳에는 항상 수천. 수만명 이상의 많은 인구가 집단 거주하면서 집이나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교통로가 집중되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즉, 촌락과 더불어 인간의 2대 거주형태를 말한다. 도시는 많은 인구와 높은 인구 밀도, 농업이 아닌 산업이 주를 이루어야되며 도시적 경관과 중심성 등을 갖추어야 하지만 인구 같은 경우에는 상대적인 것이므로 정보매체나 교통 등과 같은 각 기능의 중심성이 갖추어져야 된다고 한다. 

시대별 도시 발달 

1.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에는 식량을 체집하고 뗀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 시대를 벗어나서 인간이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고 자연의 의존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을 하였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바구니 제작과 방직 기술을 익혔으며 생산력 증가와 인구 증가에 따른 촌락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원시적인 건축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 농경의 발달로 풍요를 비는 지모신 신앙이나 사체 매장을 위한 장례방식 등 정신면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식수에 필요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큰 강가에 모여서 살았으며 생산경제가 발전하고 기술의 진보가 이루어 지는 등 2가지의 특징이 있으며, 이 시기를 인류의 위대한 생산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2. 고대

신석기 시대에는 작은 신전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석기로 농사를 짓던 도시사회가 청동기 문화시대로 오면서 점차 규모가 커졌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면서 예의와 윤리와 질서가 엄격한 계급사회로 바뀌었다. 한반도의 도시문명은 북쪽인 대동강 유역의 평양을 중심으로 시작하였으나 삼한시대로 내려오면서 남쪽인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이 되었다. 이 때에 그들은 청동과 철 등의 금속기나 토기의 제작에서도 굴레를 사용을 하였으며 농경에 말과 소를 부려 인간의 수고를 덜었으며 조직된 노동력을 이용해서 보를 막는 따위의 관개시설을 설치해서 농산물의 잉여를 쌓아갔다.

3. 고려시대

고려는 태봉국의 수도인 철원에서 개국을 하였지만 919년에 송악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 뒤에 1029년에 둘레가 2만 9700보인 나성을 완성하였고 성안을 5부 35방 344리로 구분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관아와 불사, 민가가 섞여서 매우 조밀하게 모여서 살았으며 시가 중심에는 장행랑이라는 상설 점포 외에 허시라는 노점 시장이 매일 개설이 되어서 은병과 곡물과 포목 등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시대의 지방도시 중에서 큰 것은 서경과 동경과 남경의 3경이였는데 각각 유수관을 두었으며 이 중 서경은 대대로 군사 및 정치상의 준 수도로 중시되었다. 

4. 조선 전기

조선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으며 그 때가 1394년 10월이었다. 그 해 12월에는 정도전이 책임자가 되어 신도의 조영을 시작하였다. 한양은 8도의 중앙부에 위치하였으며 남산과 인왕산. 낙산 등에 둘러싸여 있어서 천연의 성곽을 이루었으며 한강수가 감싸고 흘러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장풍득수. 산하금대의 승지여서 일찍이부터 왕도의 후보지로 거론이 되어 오곤 했었다. 이 시대에 고을은 경역이 넓고 인구도 많이 모여있었으며 교통의 요충에 위치하였었다. 그로인해 사람과 물자의 빈번한 교류에 따라서 많은 사람이 모여 살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고을의 격이 높아지면서 업무량이 늘어났고 그만큼 관아의 이속과 군졸과 노비 등과 관아에 예속되어있는 장인과 객주. 여각등 상공인도 늘어나며서 자연스레 전산업형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5. 조선 후기

조선왕조가 성립이 되고 200년이 지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병란을 겪고 난 후 도시사회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공업상의 변화와 상업상의 변화,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현상과 같이 3가지 요인이 겹치면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자세히 보면 공업상에서는 원래 관공장 중심의 독점적 수공업에서 독자적 사공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경쟁적인 생산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양질의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상업상에서는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금속화폐의 유통과 장시의 보급 및 보부상의 활동 등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인해 상업인구가 대폭 증가하였고 관인시전에 대한 사상들의 도전경쟁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현상인데 이는 적자와 서자 또는 양반과 상민의 신분질서가 흔들리고 일부 지식층의 의식개혁이 일어나면서 관리와 양반의 수탈과 천재지변에 지친 농민들이 상인 또는 공장으로 전업을 하게 된 것이다. 

6. 개항기

개항기는 강화조약을 계기로 인해서 개국, 개항한 1876년부터 1919년 국권상실까지의 시기를 말하며 이 시기에 우리 도시사회는 개항장과 개시장을 중심으로 크게 변화를 했다. 1876년에 한반도에 처음으로 개항장을 설치하게 해서 등장한 세력은 일본이였으며 그 뒤를 이어서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서구 각국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개항장과 개시장 중에는 명목뿐인 개항장도 있었지만 일본의 독무대인 곳도 있었다. 이 때 일본은 개국을 강요하던 당시부터 한반도를 자신들의 지배 아래에 둘 속셈을 그들 전관거류지의 경영에 전력을 기울일 뿐 아니라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1876년 부터 1910년에 걸쳐서 개항기가 이루어 졌으며 비록 기간은 짧긴 하나 이 사이에 기존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개편되는 중대한 변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개편과정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지방도시의 성쇠부침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이 때 외국자본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던 개항 신흥지들은 도시화가 되가는데 비해 내륙의 옛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쇠퇴의 길을 가게 되었다. 

7.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29일에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개항장제도를 폐지하였고 식민지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지방제도 개정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며 1914년 4월 1일부터 이를 시행에 옮겼다. 일본의 행정구역 개편에는 한반도를 반봉건적인 농업생산지로 머무르게 하여 그들의 식량공급지로 삼으려고 하는 저의가 숨어 있었으며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많은 부동산을 침탈하여 사실상 일본화한 곳만을 도시로 정하여 집중 개발을 하고 나머지 지역은 농산물생산지로만 묶어두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후 3.1운동을 계기로하여 종전의 무단강압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방향을 바꾼 총독부는 회사령 폐지와 관리와 교원의 제복과 착검의 폐지 등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두 79개의 부. 읍에 상수도가 시설되었지만 급수능력이 적어서 대다수의 도시민은 생활용수를 우물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전등의 경우에는 1935년까지 부.읍에 전화사업이 완료되면서 사용되었으나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후에는 철저한 제한송전으로 램프나 호롱불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으며 주택은 공급이 급격하게 늘어난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총독부의 주택정책이 일본인 위주여서 한국인의 거주사정은 매우 나쁜상태였다. 

8. 현대

우리는 지금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살아가고 있다. 현재 도시현상은 서울과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수도권의 비대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를 비롯하여 6대 광역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으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 집단현상 이 외에 전국에 걸쳐서 여러개의 도시군이 형성이 되고 있다. 또한 전 국토의 도시화 현상이 나타나며 교통과 통신,정보매체의 발달로 인하여 농촌적 생활양식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리면서 전국민의 생활양식이 일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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